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말 압델 나세르 (문단 편집) == 범아랍주의의 지도자 ==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합쳐 [[아랍 연합 공화국]]이 됐다. 나세르 본인이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서로 다른 국가를 통합하여 운영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고, 이집트 쪽이 인구수가 월등히 많고 면적과 인지도가 앞서서[* 물론 시리아도 역사적으로 볼때 이집트에 버금갈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길지만 하필 이웃이 이집트 아니면 이라크니..] 시리아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시리아측의 불만이 점점 늘어갔다. 결국 1961년 시리아가 쿠데타로 독립을 선언하며 재분리해 '''3년 천하'''로 끝내 분열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랍 국가의 추가 가입 가능성을 의식해 아랍 연합 공화국의 국호는 한동안 계속 유지됐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범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운동을 주도하였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였을때 나세르의 행보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케네디]]에게 모두 친서를 보내서 어떻게든 둘을 달래서 상황을 조용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유엔]]에서 3세계 국가들을 규합하여 1세계와 2세계 회원국들이 멋대로 결정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소련과 미국의 대결장으로 전락한 유엔을 어떻게든 사태 해결의 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나세르의 균형있는 모습은 대 한반도 외교에서도 드러나는데 나세르는 [[북한]]과 [[대한민국|남한]]과의 수교를 둘다 거부했다. 하지만 북한이 [[북예멘 내전]]에서 나세르 편을 들자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되는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남한에도 수교를 제안했지만 남한은 [[할슈타인 원칙]]을 지킬 때라서 오히려 카이로 총영사관까지 철수하니 마니 날뛰었다. 하지만 나중에 3세계와 아랍 국가들 맹주가 된 이집트와 수교하지 않았다고 아주 땅을 쳤다. 이스라엘에선 나세르를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로 파악했고 [[모세 다얀]]이나 [[다비드 벤구리온]]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의 수뇌부는 나세르의 침공을 우려해서 [[예방전쟁]]과 도발을 통해서 여러 차례 그를 자극했다. 하지만 아랍 통합으로 아랍 내부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나세르는 이스라엘이나 가자 지구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수에즈 전쟁]]과 [[6일 전쟁]]으로 잇달아 이집트와 전쟁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이집트가 패배했다. 이 때문에 나세르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곳곳에서 나세르를 아랍을 재앙으로 밀어넣은 배신자로 저주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알제리]]에선 이집트 대사관이 공격당했고 [[튀니지]]에선 이집트 문화원이 파괴되었다. [[카이로]]에서도 나세르를 괴수라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제3차 중동전쟁]]의 재앙적 패배로 나세르는 심신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흐루쇼프에게 시가를 빼앗긴 걸로 유명한 무함마드 하이칼은 10년 이상 늙어버린 나세르를 보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나세르는 노골적으로 권총자결을 암시하는 발언을 계속할 정도였다. 총사령관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는 쿠데타를 암시하면서[* 막상 제3차 중동전쟁 첫날 이집트 육공군의 궤멸에는 아메르 원수의 책임이 가장 컸다.] 국방장관 샴스 바르단을 후임 대통령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나세르는 부통령 자카리야 무히에딘을 대통령으로 삼겠다고 아메르와 합의했다. 마침내 6월 9일에 나세르는 어차피 자기가 내려오지 않으면 군대가 끌어내리게 되어 있다면서 이집트 민중이 원한다면 자신은 총살대에라도 당당히 서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오후 6시 30분, 방송을 통해 패배는 미국과 영국의 음모 때문이었다면서도 자신이 모든 패배를 받아들이고 하야하겠다고 성명하였다. >제국주의 세력은 압델 나세르가 그들의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가 아니라 모든 아랍 민족이 그들의 적입니다. 아랍의 단결을 위한 희망은 가말 압델 나세르 이전에 시작되었고, 가말 압델 나세르가 가더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살아남는 것은 민족입니다. 나세르가 그의 조국의 대의에 공헌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민중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뿐, 절대로 그 창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명이 여자, 아이, 대학생 등 거리로 나올 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쏟아져서 머리와 옷을 쥐어뜯으면서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통곡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후임 대통령으로 지목된 무히에딘은 대통령 승계를 거부하였고 국회의원, 지식인들이 대통령궁으로 몰려와 나세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요르단]]을 비롯하여 아랍 국가들의 정상들은 모두 나세르의 하야를 만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집트 국영방송은 나세르의 하야성명을 전하면서 미국 6함대가 와서 이집트를 파괴할지언정 나세르를 잃을 수 없다고 통곡하면서 나세르 지지를 천명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 외신들은 대부분 나세르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 수작을 부린 것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르몽드]] 기자 에릭 룰로만은 수백만명을 몇시간에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일축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나세르의 하야를 뜯어 말린것이나 그가 죽었을때도 전국적으로 슬퍼했던걸 보면 이집트 국민들이 나세르를 지지한것은 확실하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이전에 토지개혁, 대규모 토목사업, 대규모 학교건설 같은 공덕이 있던지라 패전이라는 상황이 닥쳐와도 여전히 지지했던것이었다. 나세르조차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척이나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 하이칼에 따르면, 나세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몇시간 동안이나 충격에 빠져 있었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하이칼은 국민은 나세르 외에 다른 지도자를 모르며, 비록 나세르에게 패전의 책임이 있지만 국민이 원하는 것은 나세르의 하야가 아니라 이 위기를 극복할 명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결국 나세르는 국민의 목소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하야를 번복하고 이스라엘의 침략의 흔적이 박멸될 때까지 자리에 남겠다는 성명을 내보냈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 성명이 발표되자 다시 이집트 전체가 환호하는 군중으로 가득 찼다. 권좌를 유지한 나세르는 곧바로 아메르 원수를 체포했으며 아메르는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대외적으로 자살로 발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